프린세스 메이커 : 예언의 아이들, 카렌을 기다리며

2026-05-09

princess maker karen
프린세스 메이커 : 예언의 아이들

추억의 카렌이 돌아왔다. 카렌! 부르다가 죽을 그 이름이여. 프린세스 메이커 팬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묻어두고 사는 이름이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혹시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왜냐면 프린세스 메이커 IP는 이미 가이낙스와 함께 싹 다 날라가버렸으니까. 진짜일까 싶어 뉴스 기사도 검색해보고, IP를 통해 제작한다는 회사에 대한 정보도 알아봤다. 일러스트의 화풍은 달라졌지만, 그 곳에는 분명히 내가 기억하는 어린 날의 내 딸, 카렌이 그 모습 그대로 녹아있었다. 감격의 순간이었다.

텀블벅 펀딩 기간이 끝난 후에 소식을 접한지라, 스팀 얼리액세스가 뜨는 날까지 고대했다. 텀블벅 펀딩에는 최종적으로 3억 5,000만 원이 넘는 금액이 모였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대와 설렘을 안고 딸을 기다렸다. 나 역시 “역시 존버하면 언젠가는 광명보는구나!” 하고 감격하고 흐뭇해했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스팀에 카렌의 얼굴이 보이던 날,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매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웬걸, 막상 얼리액세스판의 뚜껑을 열어 보니 딸아이는 14세가 되자마자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엄마를 홀로 냅둔 채 확 독립해 버리는 게 아닌가. 이상하다, 점쟁이는 내 딸이 백수가 돼서 캥거루족이 될거라고 했는데 분명. 직업? 일? 결혼? 딸아, 지금 그게 무슨 소리니? 이 세계관은 14세여도 독립을 하고 결혼도 할 수 있는 나이야? 자라나는 딸의 얼굴을 보며 흐뭇해하기 바빴는데, 다짜고짜 14세가 되어 자기의 길을 가고자 하는 카렌을 보니 당황스러웠다.

당한 맘에 부랴부랴 스팀 리뷰를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미 스팀 리뷰 창에도 “가격 대비 게임 볼륨이 너무 비어 있다”는 식의 불만이 쌓여있었다. 세계 각지의 카렌을 기다린 부모들이 뿔난 것이다.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스팀 환불 버튼을 눌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좀 달랐다. 오래된 팬이기도 하고, 이 바닥에서 꽤나 오래 리버싱을 해 온 사람이기도 하니까. 이 게임이 정말 플레이어를 기만하려고 만든 빈 껍데기인지, 아니면 만들다 만 흔적이라도 남아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환불 대신 파이썬을 들었다

CLI가 뭔지도 모르던 DOS 시절부터 프린세스 메이커를 하고 자란 나는, 에디터를 만든 누군가의 "컴퓨터 박사"라는 글귀에 사로잡혀서 해킹까지 배우게 된 사람이다. 그렇다면 직접 까봐야지. 세계 최초로 프린세스 메이커 신작의 에디터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그냥 놓칠 순 없잖아.

얼리액세스라서 크게 기술적으로 난이도가 있는 작업은 아니었다. 해온대로 리버싱을 통해 게임의 구조를 파악하고, 엔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확인하며, 어셋들을 분석하기 위해 파이썬으로 난독화를 푸는 코드를 짰다. XOR과 MessagePack으로 묶인 데이터들을 풀고 있노라니,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거 할 시간에 게임을 더 만들지 그랬어?

그런데 뜯어보니 의외의 흔적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karen_17_body, karen_17_hair, Dress_Basic_17, karen_17_face_* 같은 파일이 남아 있었다. 17세 카렌 객체도 따로 있었다. 정작 현재 플레이에서는 볼 수 없지만.

현재 빌드에서 실제 엔딩으로 확인되는 건 21개뿐인데, 추출한 데이터 안에는 여왕, 프린세스, 마왕 같은 이름들이 따로 남아 있다.

공략 가능한 파트너는 홍보 대로 총 8명이 정의 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 실제 엔딩까지 이어지는 데이터는 숲의 일족인 올리아와 클리비아뿐...

개발자들의 눈물이 담긴, 리소스 제작 중, 미구현, 개발 중인 화면입니다 같은 문구도 그대로 들어 있었다.

이건 사기일까, 사고일까?

분석 끝에 나는 세이브 에디터와 엔딩 조건 가이드까지 따로 만들어 배포했다. 에디터를 만들며 본 이 게임의 데이터 구조는 생각보다 각이 잡혀 있었다. EventDic, PartnerDic, FestivalDic 같은 상태 값도 실제 세이브 안에 따로 쌓이고 있었고.

그래서 더 열받으면서도 짠했다. 판은 크게 벌려 놨는데, 막상 오픈 당일날 가보니 재료만 가득하고 요리는 미처 다 끝내지 못한 식당 같았다.

이 글은 프린세스 메이커 : 예언의 아이들을 무조건 변호하려는 글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먹튀가 분명하다”고 못 박으려는 글도 아니다. 내가 뭘로 이 게임의 밑바닥을 긁어 봤는지, 그리고 거기서 발견한 미완성의 흔적들이 왜 이 게임을 “처음부터 빈 껍데기였던 프로젝트”라고 단정하기 어렵게 만드는지, 해커의 시선으로 확인해 본 간단한 게임 분석기이자, 리뷰에 가깝다.

20년 넘게 카렌을 기다려 온 팬으로서, 몇 년을 더 못 기다리랴? 그래서 난 비난 대신에, 아직 제작진이 보여주지 않은 흔적을 까보기로 했다. 과연 카렌은 정말 희망이 없는 걸까? 우리는 딸을 무사히 다시 볼 수 있을까?

...라는 글을 프롤로그 삼아, 프린세스 메이커 : 예언의 아이들 분석기를 썼다. 이 글이 프롤로그에 들어가지는 않게 됐지만, 그래도 쓴 게 아까워서 여기에나마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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